cinema 2017. 1. 4. 20:37

감독 : 김태용 / 훈 : 현빈, 애나 : 탕웨이



수인번호 2537번 애나. 7년 째 수감 중, 어머니의 부고로 3일 간의 휴가가 허락된다. 장례식에 가기 위해 탄 시애틀 행 버스, 쫓기듯 차에 탄 훈이 차비를 빌린다. 사랑이 필요한 여자들에게 에스코트 서비스를 하는 그는,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중이다.  “나랑 만나서 즐겁지 않은 손님은 처음이니까, 할인해 줄게요. 오늘 하루.”  훈은 돈을 갚고 찾아가겠다며 억지로 시계를 채워주지만 애나는 무뚝뚝하게 돌아선다. 7년 만에 만난 가족도 시애틀의 거리도, 자기만 빼 놓고 모든 것이 변해 버린 것 같아 낯설기만 한 애나. 돌아가 버릴까? 발길을 돌린 터미널에서 훈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장난처럼 시작된 둘의 하루. 시애틀을 잘 아는 척 안내하는 훈과 함께, 애나는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2537번, 지금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름도 몰랐던 애나와 훈. 호기심이던 훈의 눈빛이 진지해지고 표정 없던 애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를 때쯤, 누군가 훈을 찾아 오고 애나가 돌아가야 할 시간도 다가오는데...



늦가을, 외롭고 차갑고 어둡지만 사랑은 낮게 깔린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애틀의 날씨와,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영화 속 잔잔한 배경음악들이 참 좋았다.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모든 일을 숨겨줄 것만 같은 고요한 시애틀. 그 곳에서 만난 두 남녀는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우연함을 가장해 시애틀 이곳저곳을 함께 다니게 된다. 특히 애나의 짧은 외출에 시애틀이란 장소와 처음 만난 남자 훈은 왠지 위로의 존재가 된다. 애나는 지난 7년의 복역기간을 보내며 흘러간 시간과 가족이 낯설기만 하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건지, 과거의 실수 탓에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면 외출도 끝이 난다. 그렇기에 여자로써의 사소한 꾸밈도 하룻밤 보낼 남자도 애나의 무기력함에 쓸모가 없어졌다. 문뜩 마주친 남자 훈도 시애틀이 낯설기 만찬가지다. 하지만 그가 스쳤던 수많은 여자들처럼 훈에게 시애틀은 정복의 대상이다. 그런 그와 그녀가 우연히 시간을 같이 보내며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낯선 도시, 낯선 언어지만 외로운 남녀는 안개처럼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무엇보다도 애나가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옛 여인 왕징에게 별 것도 아닌 일로 화내며 울부짖는 연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오랫동안 왕징을 미워한 애나가 간신히 풀어버린 마음 속 실타래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능글맞은 훈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결국 두 남녀는 헤어짐을 맞이한다. 하지만 애나는 훈을 기다릴 것이고 훈 역시 애나를 오랫동안 그리워 할 것이다





가을의 마지막 이야기가 겨울의 마지막에 찾아왔다. 김태용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인 <만추>는 그의 첫 멜로영화다. 이만희 감독의 원작을 시애틀이란 공간, 현빈 탕웨이란 배우에게 이식한 <만추>는 섬세하게 조율된 대사와 연기로 짜여진 전작과 달리 그들이 놓인 도시와 그들의 얼굴을 숨죽여 바라보는 영화로 탄생했다. 한편, 그동안 김태용 감독이 장·단편을 통해 전해온 화해와 소통의 기적에 대한 영화라는 점 또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리메이크영화로서, 김태용 감독의 작품으로서 <만추>가 지닌 영화적 매력을 살펴봤다. 김태용 감독에게 직접 듣는 연출의 변도 함께 전한다. 


이만희의 <만추>가 두 남녀의 짧고 애절한 연애담이라면, 김태용의 <만추>는 한 여자가 버티는 하루를 그리는 영화다. 달리 말하면 애나의 감각이 다시 살아나기까지, 그래서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새로운 표정이 나타나기까지를 묘사한다. 그래서 단 하루라는 시간이 야속한 원작과 달리 애나와 훈의 만남에는 타이머가 돌아가지 않는다. 영화는 사랑일수도, 아닐 수도 있는 어떤 감정을 나눈 두 남녀가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애나의 얼굴을 집요하게 따라붙던 카메라가 드디어 그녀의 미소를 포착한 순간, 한 여자의 멈춰진 시간이 다시 흐르게 됐다는 확신만으로도 충만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낸 하루의 추억은 짧아서 아쉬운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주어진 선물이다.


씨네 21 스페셜 / 느린 호흡으로, 죽어 있던 시간을 깨웠습니다. 中 / 글 강병진 2011.2.2




탕웨이는 이 영화로 2011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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